
“학벌, 나이, 스펙 아무것도 보지 않고 오로지 AI 능력만 봅니다.”
올해 6월 열린 기업 합동 AI 해커톤 ‘AX 인재 전쟁’이 내건 모토다. 무신사, 카카오페이증권, 삼일회계법인, 마이리얼트립, 메디테라피, 채널톡 등 6개 기업이 직접 문제를 내고 심사까지 맡았다. 외부 심사위원 대신 각 기업 실무자가 참가자의 실력을 평가하고, 우수자는 곧바로 채용 절차를 밟는 전례 없는 방식이었다.
참가 자격은 단 하나. ‘휴대폰 본인 인증이 가능한 만 19세 이상 대한민국 거주 내국인’이었다. 한마디로 ‘계급장 떼고 실력으로 겨루자’는 대회였다. 여기에 5341명이 몰렸다. 현직 소프트웨어 개발자부터 대학생, AI 실력을 평가받고 싶다는 국밥집 사장까지 이력도 다양했다. 연령대도 10대부터 50대까지 폭넓었다.
예선을 통과한 60명은 지난 7월 서울 영등포의 한 공유 오피스에서 본선을 치렀다. 6개 기업이 낸 문제 가운데 하나를 골라 3시간 동안 AI로 풀고, 결과물을 각 사 담당자에게 일대일로 설명해야 했다. 기업별로 1명씩 뽑힌 우승자는 곧바로 채용 면접에 진출했다. 기업들은 우승자 외에도 실력이 돋보인 참가자에게 개별적으로 연락했고, 최종적으로 7명이 채용됐다. 한 참가자는 “너무 재미있었다”며 “앞으로 이런 대회가 기업 채용의 표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파격적인 대회를 기획한 곳은 AI·코딩 교육 유튜버가 설립한 조코딩AX파트너스다. 챗GPT 개발사인 오픈AI도 기술 파트너로 합류했다. 주최 측은 “참가하고 싶다는 기업들의 연락이 많아 조만간 2기 대회를 열 예정”이라고 밝혔다.
◇계급장 떼고 AI 실력만 본다
AI 활용 능력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요소로 떠오르면서, 학벌·전공·나이 같은 스펙을 묻지 않고 AI 실력으로 인재를 뽑는 해커톤이 재계의 새로운 채용 방식으로 확산하고 있다. 이력서에 적힌 조건보다 현장의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을 채용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겠다는 기업이 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 견고하게 자리 잡았던 ‘스펙 장벽’에 AI가 균열을 내고 있는 셈이다.
‘청년 선호 직장 1위’인 SK하이닉스도 올해 처음으로 총상금 1억원을 내걸고 블라인드 방식의 AI 해커톤을 연다. 만 18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해 지난달 28일까지 신청을 받았는데, 수천 명이 몰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달 중 예선을 거쳐 11월 11일 본선을 치를 예정이다. 회사 관계자는 “학력·전공·학점 등 스펙 정보를 일절 보지 않고 순수하게 AI 문제 해결 역량만 볼 예정”이라고 했다. 우수자는 서류·필기 전형을 건너뛰고 곧바로 채용 면접을 본다.
LG그룹도 지난달 경기도 이천의 임직원 연수 시설인 LG인화원에서 미취업 청년 대상 AI 해커톤을 열었다. 해커톤 도입 5년째인 올해, 역대 가장 많은 3393명이 지원했다. 공대생뿐 아니라 문과대생, 의대생까지 도전장을 냈다. LG는 앞선 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참가자를 각 계열사가 채용해 왔다. LG이노텍에서 각종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최정명 선임도 해커톤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인사팀에서 곧바로 입사 제안을 받은 경우다.
◇기업의 실제 문제, 어떻게 푸는지 살펴
AI 해커톤의 출제 문제에는 기업이 현장에서 맞닥뜨린 고민이 그대로 담겨 있다.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떠오르는 트렌드를 먼저 감지하는 AI 모델’을 만들라는 과제를 냈다. AI를 다루는 능력은 기본이고, 이미 정점을 찍은 유행과 이제 막 떠오르는 유행을 구별하는 감각도 보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유행의 조짐을 어떤 신호로 포착하는지도 평가 대상이다. 여행 플랫폼 마이리얼트립은 ‘실제 예약까지 가능한 AI 여행 추천 모델’을 주문했다. AI가 짜주는 여행 일정이 그럴듯해 보여도 막상 떠나려 하면 동선이 맞지 않거나 예약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과제였다. 카카오페이증권은 투자 종목을 정한 초보 투자자가 실제 매수·매도까지 쉽게 할 수 있도록 직관적인 매매 지원 시스템을 만들라는 과제를 냈다.
LG가 AI 해커톤에 출제한 문제도 현장에서 나왔다. 프로야구단 LG트윈스를 운영하는 LG스포츠는 ‘투수의 제구 성공 확률을 예측하는 AI 모델’을, LG화학은 ‘난임 환자의 임신 성공 확률 예측 모델’을 개발하라고 했다. 리조트 사업을 하는 LG그룹 계열 D&O는 ‘식음 업장 고객의 메뉴 수요 예측 모델 개발’을 과제로 제시했다. 각 계열사는 실제로 해결해야 할 문제와 함께 방대한 관련 데이터를 제공했다. AI가 없던 시절에는 쉽게 풀기 어려웠던 난제들이다. 대회를 통해 독창적인 해법을 찾고, 이를 풀어낼 인재까지 확보해 회사의 역량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단순한 문제 풀이는 이제 AI가 가장 잘한다”며 “기업이 현장에서 부딪친 난제의 본질을 스스로 정의하고, AI를 활용해 이를 끝까지 해결하는 사람이 기업들이 AI 해커톤을 통해 찾으려고 하는 인재”라고 했다.
☞AI 해커톤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정해진 시간 안에 프로그램이나 서비스의 시제품을 만들어 겨루는 대회. 해킹(hacking)과 마라톤(marathon)의 합성어로, 여기서 해킹은 보안 침입이 아니라 기발한 아이디어로 프로그램을 짜는 일을 뜻한다. 개발자·디자이너·기획자 등이 팀을 이뤄 보통 1~3일 동안 아이디어 기획부터 시제품 구현, 발표까지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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